연구

입양 칼럼


입양에 대한 통합된 이해로 국내입양의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는 다양한 입양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입양아의 사춘기'


입양아의 사춘기

 

허 선화

 

입양아의 사춘기. 과연 입양되지 않은 아이들의 사춘기와 다른 점이 있을까. 최근까지 나는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삼 개월의 경험이 나에게 나름 확고한 견해를 갖게 해 줬다. 다른 점이 있다. 확실히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딸의 사춘기가 어떤 경로를 거쳐왔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춘기에 대략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감이라도 잡기를 원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나는 생생하고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입양아의 사춘기 얘기는 마치 금기처럼 내부 써클에 들어가야만 들을 수 있는 비밀문서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그 문서를 개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사실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내 딸의 이야기 역시 비밀로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5학년 가을, 반에서 딸과 묘하게 서로 부딪히는 아이가 있었다.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랄 것 없이 서로 상처받고 힘들어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멀쩡히 학교에 다녔고 딸은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를 싫어했다. 그때부터였다. 딸이 학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은. 딸은 외로움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강력하게 강아지를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가지고 있다며 아이폰을 사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나는 사춘기가 도래했음을 감지했다. 더 이상 “안돼”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입양 직후 분출했던 욕구가 몇 년 동안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는데, 다시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입지도 않을 옷을 사대고 점점 검은색 이외의 옷은 사라져 갔다. 6학년이 되자 화장을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풀메’(풀메이크업)에 도달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식욕이 폭발하여 살이 급격하게 찌기 시작해 몇 마디 했더니 어느 날 가위로 살짝 손등에 상처를 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우연히 상처 자국을 보고 딸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딸은 짜증을 내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그때는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울며불며 개천가를 배회했다. 딸은 방문을 닫아걸었고 화가 나면 “집을 나갈 거야!”라고 소리쳤다. 다른 엄마들이 가르쳐 준 대로 “나가긴 어딜 나가!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오는 줄 알아!” 큰 소리를 내면서 내 마음은 졸아들 대로 졸아들었다. 딸은 집을 나가지 않았다. 며칠 후, 딸은 미안하다며 엄마가 살쪘다는 말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말로 들려서 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그렇게 들을 수가 있나. 지금은 이해한다. 그렇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6학년 때도 친구들과의 관계가 계속 힘들었다. 딸의 세고 거친 기질이 비슷한 아이들과 자꾸 부딪혔다.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딸은 ‘페메’(페이스톡 메시지)를 통해 하도 찰지게 욕을 해서 상대 아이의 어머니를 격분시켰고, 학교에서는 기가 센 다른 반 아이들과 쉬는 시간에만 어울렸다. 다행히 경험 많은 선생님께서 딸을 긍정적인 눈으로 보셔서 매번 잘 넘어가도록 지도해 주셨다. 딸의 입양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굳이 입양으로 설명할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그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흔하니까.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좀 사나웠어도 귀여운 사춘기였달까. 정신과 의사에게서 부모 코칭을 받기 시작했는데, 의사 말이 엄마에 대한 딸의 감정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했다. ADHD약 용량을 늘리고 코칭 받은 대로 실천하면서 나름 평온한 휴지기가 왔다. 가장 도움이 되었던 코칭은 “되는 것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된다고 하고, 안되는 것은 끝까지 안된다 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일관성. 그전에도 일관성은 있었다. 그러나 허용되는 것을 전보다 많이 늘리고 “안돼”라는 말을 대폭 줄였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남편과 내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어?”하고 물어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했다.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을 때는 계약서를 써서 나와 딸이 함께 날짜를 적고 사인을 했다. 한마디로 일방적인 해결 방식을 지양하고 딸의 자율성과 의사를 존중해준 것이다. 한동안 그 방법이 먹혔다.

그러나 휴지기는 길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 중1 때 사춘기의 절정이 도래했다. 하필 코로나까지 터져서 딸은 몇 번 학교에 가보지도 못하고 집에서 원격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다른 동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결손 가정 아이들이 딸의 친구들이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들은 미안한 마음에 물질로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있었다. 거기서 딸은 술과 담배를 배웠다. 최근까지만 해도 그것이 친구들의 나쁜 영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게 무슨 입양이란 상관이 있단 말인가.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그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서 그 무리에 낄 수는 없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늦게 들어오고 억지로 허락을 구해서 자고 들어오고 심지어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서울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딸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강한 대치 국면에 돌입했다. “내가 죽으면 될 거 아냐!”라는 딸의 말에 “아니, 네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져? 내가 죽어야지”라는 막말이 오가기도 했다. 나는 집 밖으로 나도는 딸이 너무도 불안했고 곧 무슨 큰일이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딸은 입양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꺼내려고 하면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그냥 생각하기가 싫은 줄로만 알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무렵부터 딸은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민감하지 못했고, 그 무렵 아픈 친정 동생의 일로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이미 딸은 나에게 힌트를 주었다. “내가 이렇게 집 밖으로 도는 건 엄마가 삼촌 문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마한테는 나보다 삼촌이 훨씬 중요하지?” 아무리 아니라 해도 딸은 믿지 않았다. 믿지 못할 만큼 내가 비정상적으로 동생에게 과몰입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 안 것은 “아, 딸은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괴로웠구나” 정도였다. 나는 그 사실을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딸에게는 이미 친구들이 더 중요하고 부모와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딸은 자신이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온통 정신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게 딸은 이미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였기에 나는 그런 딸의 말이 오히려 좋았다. 딸에게 ‘우리 가족’이라는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이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는데 그때는 몰랐다.


어차피 끊을 수 없는 담배였는데 남편과 나는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을 때, 딸은 울면서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답했다. 이미 딸은 대안학교에 대한 정보를 알아놓고 그곳으로 보내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지금 딸은 “엄마가 나를 감옥으로 보낸 거야”라고 원망의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미안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정신적 상태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딸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만약 그때 최근의 일이 터졌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결과적으로 딸은 이년의 시간을 내게 벌어 주었다. 대안학교에 다니던 이 년 동안 딸은 이런저런 고충을 호소해 왔지만, 나와의 관계는 급격하게 호전되었다. 딸은 집이 좋고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듯했다. 좋은 선생님들과 선배들을 만나 점점 변해가는 딸의 모습에 중 2 가을쯤 되어서는 이제 사춘기도 끝나가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딸이 남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외모 비하를 겪는 사건이 일어났다. 딸은 아주 많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때까지는 주로 가해자(?)였던 딸이 피해자가 되고 보니 확실히 딸의 편의 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학교로 출동하고 나는 전화로 강력한 조처를 요구했다. 딸과 함께 남학생들 욕을 하면서 어떻게든 딸에게 내 편이 있다는 든든함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부족했나 보다. 악몽을 꾸며 힘들어하던 딸이 방학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이제 괜찮아?”하니 괜찮다 해서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지금 딸은 말한다. 그때 엄마와 선생님들이 그만 그 아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해서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넘어간 거라고. 그래서 학교에서 너무나 외로웠단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죽고만 싶었단다. 그러나 딸은 철저하게 자기 아픔을 감췄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밝은 딸의 모습에서 누구도 위태로운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딸의 고통은 불면증으로 나타났다. 기숙사에서 밤마다 두세 시간밖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딸은 너무 예민해서 소리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했다. 선생님들도 나도 그 말을 믿었다. 도저히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여름 방학까지만 학교에 다니고 자퇴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보자 했다. 이때까지 나는 딸이 철이 많이 들었고 우리 가족은 단단해졌다고 믿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


이제 최근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겠다. 입양과 사춘기가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확신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굳이 사건이랄 것도 없다. 시간이 남아돌아 공부는 하기 싫었던 딸은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카페 일이 너무나 재미있다며 성실하게 일하는 딸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나는 이 년 정도 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딸의 사춘기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기 때문에, 입양 엄마들에게 딸 자랑을 많이 했었다. 자식 자랑은 정말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딸 자랑이 아니라, 나름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 내 자랑질을 해오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건 더 해서 안 될 일이었다.


딸은 카페 일이 끝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카페 사람들이나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렸다. 나는 다시 내 스트레스 게이지가 올라가는 것을 감지했다. 사춘기 내내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딸의 귀가 시간이었다. 가출한 적은 없었지만, 자주 늦다 보면 가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까. 딸아이이기 때문일까. 어쨌든 딸의 귀가 시간은 항상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날도 12시가 다 돼 가는데 딸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딸과 전화로 대화하던 중에 정말 얼떨결에 딸은 그동안 묵혀왔던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집이 불편하고 들어가기 싫은데 그 이유는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엄마 같지 않고 밉고 싫다. 입양된 것이 싫다. 보육원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다. 보육원에서 자란 언니가 나보다 더 잘 산다. 내가 ‘입양 당한’ 날은 너무 끔찍했다. 부모가 날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엄마와 나는 너무 다르고 우리는 이미 틀렸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집에서 나가고 싶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이 얘기는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다. 이제 엄마 얼굴을 어떻게 보냐...

그날 이후 딸은 매일 집에 들어왔지만, 일주일 이상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직감적으로 ‘아, 이제 터질 게 터졌구나. 잘 터졌네. 혼자서 꽁꽁 마음속에 숨겨두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딸의 말이 마치 해독해야 할 암호 같아서 머리가 복잡했다. ‘무엇이 늦었다는 것이지? 뭐가 이미 틀렸다는 거야?’ 사춘기 때 입양아 중 입양 이슈로 유독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우리 딸은 아닌 건가?’ 했었는데 바로 내 딸이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 줄 몰랐다니. ‘어떻게 알아? 그렇게 철저히 숨겼는데...’ 온갖 생각이 오갔다. 처음에는 딸이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서 울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마음을 닫아건 딸이 언제 빗장을 풀지 알 수 없었다. 주위 입양 엄마들은 내가 이 시기를 잘 버텨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상담을 신청하고 입양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입양인의 속마음』을 다시 읽었고, 처음으로 『원초적 상처』를 읽었다. 두 번째 책이 훨씬 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첫 번째 책에서 말하는 아이가 애도하는 것을 도울 길은 현재로선 완전히 차단되었다. 딸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있었고 그 분노는 나에게 향해 있었다. 딸이 생모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느 날 딸은 “앞으로 내 앞에서 생모 얘기 꺼내지 마. 그 사람이 평생 아주 힘들게 살았으면 좋겠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누군가 그 분노를 받아내야만 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 입양 엄마인 나였다.


사실 나는 딸의 슬픔을 함께 애도할 때만을 기다려왔다. 딸의 분노를 내가 받아내야 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고 제대로 들은 적도 없었다. “내가 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연히 엄마인 내가 할 몫이라 여겼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팠다. 딸은 기회만 있으면 나와의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 나는 딸이 버림받을까 봐 극도로 불안해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딸의 불안은 실제적이었다. 그런데 나 역시 딸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닌가. 마치 몇 년이 지나면 딸이 나를 영영 떠날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딸은 마음으로 나를 떠난 것 같았다. 그 단절의 고통이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 고통으로 또 몇 날을 울었다. 딸을 잃은 느낌이랄까. 그토록 다정하고 친밀했던 딸이 너무 낯선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입양 엄마들, 당당해지세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에는 몰랐다. 아니, 당당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막상 딸이 나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고 나에게서 멀어져갈 때 나는 한없이 위축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네 엄마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자신이 의심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가 이럴 수가 있다니? 나는 폭풍을 만난 작은 고깃배처럼 무섭게 흔들렸다. 다행히 딸이 밤늦게 들어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지만,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면 작은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무서웠고 슬펐다. 슬프고 아팠다. 딸이 너무나 가여웠다. 버림받음의 상처를 평생 가지고 살아가야 할 그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게 입양이구나. 나는 처음으로 입양의 실체에 제대로 다가선 기분이었다. 그동안 큰아이 이슈에 묻혀 입양의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이제 지난 석 달 동안 상담받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치열하게 생각하면서 정리한 사춘기와 입양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려고 한다.


입양 이슈는 평생 가는 것인데 왜 하필 사춘기에 화산처럼 분출하는 것일까. 왜 어떤 아이들은 행동화로 생모와 입양 사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그런대로 무난히 이 시기를 넘어가는 것일까. 내 나름의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사춘기라는 시기의 발달적인 특성상,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 문제로 누구나 힘들어하지만, 입양아들에게는 생모로부터의 초기 분리, 혈연적 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에서 자기 위치라는 문제로 정체성의 문제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때로는 위기 상황을 동반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이 시기에 입양 부모를 ‘진짜’ 부모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은 리얼한 상황인 것 같다. 그전까지 아무리 애착이 잘 되어 있었더라도 ‘과연 내가 이 가족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맞는가?’ 심지어 ‘내가 이 가족에 소속될 자격이 있는 것일까?“라는 고통스러운 물음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듯하다. 딸이 이런 말을 했었다. “행복한 아빠, 엄마 관계에 내가 끼어들어 두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말을 통해 딸은 과연 내가 이 가족에 속한 게 맞는지 소속감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나는 이 집에서 환영받지 못해”, “아빠는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이 없어”, “둘만의 세계가 있다”는 등. 딸에게는 그렇게 말할 만한 근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소속감의 문제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소속감이 희박하거나 흔들리므로 사춘기 아이는 집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제는 입양 부모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전에 아무리 닮은 점을 찾아서 얘기해 줬더라도 이제 아이는 다른 점이 닮은 점을 훨씬 압도한다는 걸 안다. 이제는 닮은 점을 강조할 때가 아니라, 다름을 그냥 인정할 때인 것이다. 어느 날 딸은 “엄마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달라.” 고로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말들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다른 게 뭐 어때서? 그래서 왜 가까워질 수 없는데? 그러나 아이의 생각은 다르다. 부모와 외모, 성격, 재능 등이 다르다는 데 대해 아이들은 고통스러워한다. 같아지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 절망한다. “나는 나랑 다른 네가 좋아. 엄마보다 나은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말이 아직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굳이 부모와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아이들은 더 성장해야 한다.


사춘기 때 아이들은 생모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하는 듯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을 버린 생모에게 분노를 느낀다. 사춘기 아이들이 과연 자기를 열 달 동안 품어준 생모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버려진 것이 아니라 포기된 것이라는 말이 다르게 들릴까. 나는 회의적이다. 이제 아이들은 그동안 들어왔던 말들을 자기식으로 소화해야만 한다. 그것은 어려운 과제다. 생모와 함께 아이들은 입양 엄마에게도 분노를 느낀다. 생모에게서 떼어놓은 존재라고 생각하건, 입양 엄마 때문에 다시 생모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건, 단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해서건 엄마는 분노의 표적이 된다. 이미 사춘기 전에 분노가 해결되었거나, 사춘기에 분노를 드러내어 표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솔직히 그런 가정이 부럽다. 그러나 사춘기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이의 기질이다. 전문가들도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내 생각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기질에 따라 말로 표현하는 아이가 있고 속 깊이 묻어두는 아이가 있다. 불행히도 우리 딸은 후자였다. 기질에 따라 행동화로 표출하는 아이가 있고 숨기고 괜찮은 척 지나가는 아이가 있다. 다행히 우리 딸은 전자였다. 후자로 가려고 했는데 아이의 기질상 결국 터뜨리고 만 것이다.


나는 대부분 입양아가 이 시기에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일반적으로도 사춘기 때 부모에게 자기 속마음을 얘기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게 꼭 나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입양아의 경우 말을 하든지 행동화로 표현되든지 둘 중 하나일 때가 그저 무난한 사춘기를 보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행동화로 표현될 경우, 부모들은 극한 어려움에 봉착한다. 사춘기 때 왜 파양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리는 것일까. 한 번도 입양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던 가족이 왜 이 시기에 입양 가족들을 찾게 되는 것일까. 아이가 행동화로 표현하므로 입양 부모로서 역할에 큰 어려움과 좌절을 겪기 때문이다.


사춘기 입양아 부모 역할이 어려운 이유를 생각해 봤다. 일단 사춘기 자체가 어렵다. 부모들은 사춘기에 대해 잘 모른다. 나도 그랬다. 우리 세대는 사춘기를 모르고 자랐다. 사춘기가 분리와 독립의 시기라는 것을 알지만 부모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 아이의 사춘기를 맞는다. 그래서 관계 조정을 제때 빨리 못 한다. 아직 철도 나지 않은 아이를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격으로 대우해 주기가 힘들다. 사춘기에 대한 무지가 부모 역할을 힘들게 하는 첫 번째 요소다.


게다가 입양아인 경우, 이제는 입양이 무엇인지 새로운 이해를 해야 할 때인데 기존의 입양 이데올로기가 발목을 잡는다. 입양했으면 가족이 된 것이고 아이의 초기 분리, 상실 문제는 그동안의 헌신적인 돌봄과 사랑으로 대부분 해결되었으며, 입양 가족은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다는. 입양은 특별할 게 없다는. 나는 더 이상 이 이데올로기에 찬성하지 않는다. 입양 가족은 다르다. 입양은 아주 복잡하고 어렵고 때로는 매우 슬픈 것이다. 그리고 사춘기 위기를 넘어가는 입양 부모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다. 아이의 분리, 상실 문제는 평생 갈 것이고, 사춘기는 그 문제가 위기로 불거져 나오는 시기다. 그러니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들에 따라 극한까지 부모의 인내를 시험하기도 한다. 부모는 사랑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벼랑으로 몰린다. 당연히 가족의 힘만으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 그래서 전문가의 개입이 요구되고 입양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게 전화를 자주 하는 엄마가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나는 전문가를 소개해 주고 나서 “이제 내게 묻지 말고 전문가에게 물어. 그리고 힘들 때 언제든지 나한테 전화해. 내가 들어주고 같이 울어줄게”라고 말했다. 그제야 엄마는 처음으로 전화기를 들고 울었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울 수 있다면 좋겠다.


사춘기 입양아 이슈와 엄마의 이슈가 맞물릴 때 사춘기는 훨씬 엄마에게 훨씬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특히 엄마가 갱년기를 심하게 겪거나 중년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면. 내 경우가 그랬다. 갱년기 증상이 너무 심해 초등학교 때 딸아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던 것이 사춘기에 불만이 되어 날아들었다. 엄마와 이미 늦었다는 것이 그런 의미였다. 그때 아이는 나의 섬세한 돌봄이 더 필요했다. 갱년기를 겪는 엄마의 저질 체력은 공격해대는 사춘기 아이에게 변명거리가 못 된다.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네가 그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몰랐어. 정말 힘들었구나.”라는 이해의 말이다.


내가 딸의 사춘기를 죽음을 떠올릴 만큼 힘들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나 자신의 분리 이슈 때문이다. 나는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 사실은 평생 인간관계에서 분리와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딸도 그러리라는 걸 안다. 분리를 두려워하는 나는 딸과 너무나 밀착되어 있었다. 딸이 나와의 분리를 급격하게 시도하자 나는 죽을 듯한 불안을 맛보았다. 마치 다시 어머니를 잃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나와 딸의 관계로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딸은 자기가 버림받기 전에 먼저 떠나 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딸과의 분리를 상상하기도 끔찍했고 그 이후의 삶은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진짜 위기는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입양 엄마의 자격. 자신의 분리, 상실의 이슈를 잘 다룬 사람. 아이에게 들러붙지 않고 아이가 분리될 때 흔들리지 않고 담담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 그런 엄마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엄마라면 사춘기의 폭풍을 잘 뚫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되므로 지금 아주 혹독한 변화 중이다.


이제 글을 맺어야겠다. 지난 석 달의 경험을 통해 나는 좀 달라졌다. 우선 입양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정립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딸의 ‘진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딸에게 나는 아직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것이 준 충격이 컸지만 이제 받아들인다. 그리고 딸이 나를 진짜 엄마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것은 딸이 할 일이라는 것, 그것은 딸의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언젠가 딸이 그 선택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러리라고 믿고 기다릴 것이다. 두 번째로는 딸을 독립시킬 준비를 시작했다. 빠르면 삼 년 후가 될 것이다. 갑작스러운 독립은 나에게 또 큰 상실로 다가올 것이므로 서서히 준비하고자 한다. 딸이 벌써 분리 시도를 하는 바람에 나에게 이런 변화가 생겼다. 딸이 고맙다.


나는 성인이 된 딸과 친구같이 친밀한 관계가 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진정한 모녀 관계는 성인 이후에 시작된다고 한다. 친밀을 가장하여 딸을 지배하고 간섭하고 조종하는 엄마가 되어 딸에게 부담을 주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이 제대로 분리, 독립하여 내 삶을 사는 게 큰 숙제로 떠올랐다. 사실 그동안 딸이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딸에게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딸은 반항하고 저항하며 엄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구축하려고 한다. 딸은 잘하고 있다. 문제는 나다. 그래서 딸 없이도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거의 찾았고 실천만 남았다.


사춘기 부모가 입양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뭘까. 너무나 지친 엄마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자녀의 아픔과 힘겨움을 이해하고 그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녀를 더욱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 자녀들은 알아차리지 않을까. 완전하지는 않아도 부모가 자기를 이해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살아나가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입양 부모들이 정말 많이 다름을 느꼈다. 성격, 가치관, 경험, 입양에 대한 견해가 다 달랐다. 때로는 입양 가족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 내가 유별난 사람인 것만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꽤 길게 나눈 이야기에 다른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괜찮다. 어차피 사람은 다 다르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다르듯. 중요한 건 다른 이야기들을 해 본다는 거다. 그리고 나를 넓혀가는 것이다. 우리의 소위 입양 생태계가 더 넓고 깊고 다양한 바다 같은 곳이 되기를,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많은 말씀을 드렸다. 마지막으로, 이제 입양아의 사춘기도 감추지 말고 제대로 연구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22년 12월 30일